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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끝없이 싸우기

내일은 드디어 포르투갈 해안가로 여름휴가를 떠나는 날. 6월에 3주 동안 한국에 다녀오긴 했지만 정말이지 그저 쉬는 것을 목적으로 한 휴가다운 휴가는 올해 들어 처음이다. 달력을 보니 작년 11월 3박 4일 베를린 여행이 마지막이라면 마지막. 그 이후로 시작된 빅토르의 긴 이직 프로세스와 나이트 근무, 돌아가신 할머니 집을 사게 되면서 생긴 각종 서류 절차들, 대학원 수업, 결혼 준비.. 갑자기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쳐낼 수 없는 크고 무거운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내내 껌껌한 바다 깊은 곳에서 헤엄치는 기분으로 반 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은근히 여름을 기대했던 것 같다. 쨍쨍한 햇볕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초록의 생기를 상상했고 그만큼 에너지 넘칠 날들을 막연하게 바랬다. 하지만 막상 여름이 찾아오자 순진한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드리드의 더위는 극악무도했다. 이미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계속 이렇게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한 남자친구가 서둘러 준 덕분에 떠나게 된 휴가지만 어젯밤에는 또 밤새 불안에 시달렸다. 내가 잘 아는 나의 모습 중 하나는 불안에 몹시 취약하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따금씩 떠오르는 나의 용감함이 나를 살도록 이끌었다면 급기야 신체화되고 있는 불안이 다른 한쪽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은 내 기저 어딘가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가 잠깐 사이에 나를 완전히 압도한다. 어젯밤을 예로 들자면 대충 이런 식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논문 연구에 진척을 내지 못했다. 하고 싶지 않아서 피해 다녔다는 말이 사실 더 정확하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려면 맘 속에서는 이미 불필요한 전쟁을 오래 치르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야 한다. '해야 하는데..'라는 한 마디가 까끌거리는 자갈 크기였다가 나중에는 절대 던져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바윗덩이가 된다. 다른 일들을 하는 또는 하지 않는 모든 시간 동안 돌이 그 자리에 계속 버티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계속 고통 속에 나를 내버려둔다. 나를 계속 내버려두고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악순환을 만든다. 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끈이 차츰차츰 희미해지면 불안은 몸집을 키운다. 깜깜하고 텅 빈 집에 남아 침대에 털썩 누웠을 때 머릿속은 온통 '절대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하는 생각으로 가득차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왕왕 울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불안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때 나는 나름대로 창문을 열거나 팟캐스트라도 틀어보면서 헤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 그냥 지는 수 밖에 없다.

내 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느끼는 것은.. 정말 너무 싫지만 한편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시그널의 역할을 해준다는 기특한 점이 있다. 만약 논문 쓰기를 영원히 미루는 것이 진짜 돌멩이의 핵심이라면 돌멩이는 때때로 위장하기 때문에 핵심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사실 돌멩이를 던져버리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논문을 쓰거나 아예 쓰지 않기로 결심하거나. 나는 나를 못살게 구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만약 후자를 선택한다면 '게으름 때문에 포기하는 거다', '회피형 결정에 의미를 붙이는 일이다' 같은 말들이 뭉게뭉게 떠오를 테지만. 지금의 내가 계속 살아가는 데에는 돌멩이를 던져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논문을 지금 안 쓰면 내년에 써도 좋고 수료로 끝나도 내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라고 어렵사리 내뱉는 순간 보통 바윗덩이는 산산조각 나버릴 확률이 높다. 자의로 또는 타의로 중요하다고 이름 붙였던 것에서 이름표를 떼어버리는 일의 힘은 크다. 무게를 덜어내기만 해도 그 일을 다시 시작해볼 엄두 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을 한바탕 치른 후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첫 progress report를 만들어 지도교수님께 보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놓지 않겠다는 작은 신호를 나에게 또 교수님께 보내는 일이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잘 잘 수 있을 것이다. 짐을 싸고 집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 이메일을 보내고 맞이한 휴가와 그렇지 않은 휴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테니까. 불안과 나는 이렇게 엉겨붙어 떼굴떼굴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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