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사회' 독서모임 후기
'폭염사회' 독서모임 후기
투룸메이트에 재가입한 후 수진 님이 이끄시는 '폭염사회' 독서모임을 가졌다. 마드리드에서 이방인으로 보낸 짧고도 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온라인에 기대어 오프라인에서 미처 다 채우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채우는 경험들을 했던 것 같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다시 찾기도 했고, 혼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해보거나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 없는 곳을 탐험하기도 했다.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사는 스튜어트와 스페인 사람과 결혼해 스페인에 사는 내가 만나 영어공부를 빙자해 온갖 주제에 대해 수다를 떨던 시간, 작은배 강단 님이 이끄셨던 '번역 없이 공부하기' 소모임, 투룸메이트에서 종종 참여하고 또 직접 열기도 했던 소모임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폭염사회' 소모임에 이끌렸던 것은 이번 여름,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유례 없는 폭염을 겪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사실 일상화된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할 만큼 매년 뜨거운 여름을 보내기 때문에 비교적 정부조직이나 국민들도 폭염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충격이 크지 않다. 반면 에어컨 설치가 당연하지 않은 많은 서유럽 도시들에서는 이동식 에어컨이 동나고 있고,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에어컨 설치 자체에 방해물이 많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폭염이 어쩌다 올해 한 번 찾아온 특이현상이 아닌 앞으로 스페인처럼 계속 마주해야 할 현실이라면 장기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운 좋게도 독서모임에는 뉴욕의 수진 님과 프랑스 소도시에 살고 계시는 하레 님이 계셨다.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폭염사회'는 너무 많은 사상자를 낳은 1995년 시카고 폭염을 사회적 재난으로 정의하고 고립, 인종과 장소, 정치와 사회 서비스, 언론과 뉴스 등 네 가지의 층위에서 '사회적 부검'을 시도한 흔적을 담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 책이 2018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으로 그 때부터 이미 폭염이 태풍이나 지진과는 다른 양상을 가진 재난이며 이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 층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연재해라는 익숙한 이름을 벗겨냄으로써 앞으로의 논의에 비단 기상학자나 공공보건학자만이 아니라 사회와 정책, 언론이 모두 함께 참여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고립, 왜 자꾸 우리는 혼자가 될까 또는 혼자라고 느낄까
고립은 한동안 자주 생각했던 문제 중 하나다. 함께 사는 사람이 있고 한국에도 가족이 있고, 연락하는 친구들과 지인들도 있지만 여전히 너무 고립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그게 섬뜩할 만큼 피부로 와닿았고 나의 사회적 안전망을 꾸리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혈연 지연 학연이 여전히 아주 짙은 이 나라에 살면서 일상의 평안과 행복은 물론이고 생존 그 자체에도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꾸만 마주했다. 인터넷을 동력 삼아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시대에 왜 자꾸 우리는 혼자가 되는 일을 경험할까. 온라인에서의 과잉연결이 오프라인에서의 연결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삶이 균형을 잃어가는 게 적어도 우리 세대의 문제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 년도 넘게 메세지로라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동기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감성 넘치는 사진을 보고 어떤 카페를 갔는지는 알지만, 아랫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2주도 넘게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사실은 모르는 현실은 어쩐지 괴이하다. 이제는 낭만처럼 느껴지는, 부채를 들고 평상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슈퍼 앞에서 수다 떠는 아주머니들로 설명되는 90년대 어느 동네의 여름을 생각해본다. 그림 속 인물들은 이웃이라는 느슨한 이름 아래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다(비록 당시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 사실이 갑갑하게 여겨지기도 했겠지만). 초등학생 때만 해도 집집마다 유선 전화가 있을 때여서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나 할머니께 '누구 누구 집에 있어요?'라고 묻는 일도 익숙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연결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인종의 문화적 특성에도(!) 힘이 있다
인종과 장소 파트는 책 속에서 아프리카계 흑인과 라틴계 주민이 각각 주를 이루는 두 동네를 비교하면서 전개된다. 저자는 인종의 문화적 특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산업 변화에 따른 주민 유입/유출, 거리의 활동성, 폭력과 불안, 교회 등을 다룬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인종의 문화적 특성이 아예 설명변수가 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드리드, 특히 내가 사는 곳에는 라틴계 이웃들이 많이 산다. 적법한 이민 절차를 밟지 않고 온 사람들도 많고, 학위나 기술이 필요 없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대부분 평균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아 생활한다. (올해 페드로 산체스 정부가 미등록 이주민에게 합법적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난리 아닌 난리가 났는데 바로 이 라틴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농업/관광/서비스업의 큰 부분을 라틴계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로 구성된 대가족 또는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난 친구들 여러 명이 아주 작은 집에 복닥복닥 모여 살지만 그들의 끈끈함이 그들을 살게 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집에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대부분이 거리로 나온다. 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이야기를 나누고, 안부를 챙긴다. 수진 님의 말대로 이 끈끈한 문화가, 또는 함께 살붙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환경이 코로나 때처럼 때로 불행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왜 인종 정보 수집율이 낮을까?
미국과 다르게 유럽에서는, 아니 적어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종(race/ethnicity)을 적극적으로 통계변수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적극적인 사용까지 갈 필요도 없이 Census에서부터 포함/불포함 여부가 선명하게 갈린다. 스페인 정부에서 하는 인구통계에서는 국적(nacionalidad)과 출생국(país de nacimiento)이 포함되어 있어 이민자들에 대한 출생국 정보만을 파악한다. 그런데 하레 님이 '묻는 것 자체를 인종차별로 여길 수 있다'는 발언이 어쩐지 계속 이해되는 느낌(?)이었고 독서모임이 끝나고 나서 실제로 스페인 학계 및 정부조직 내에서 '인종을 기록하면 인종주의가 된다'는 입장과 '인종을 기록하지 않으면 인종주의를 측정할 수 없다'는 입장 사이의 긴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최저소득보장 등의 복지 프로그램에서 소득/거주/지역 등 인종적 아이덴티티와 연결짓지 않은 보편적 타겟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프리카계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저소득 가구이기 때문에' 수급 대상이 되는 논리고 이게 하레 님과 내가 느끼는 이들의 평등이다. 하지만 아시안의 주택임대 거절 비율이 백인보다 높은 것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인종 변수가 없으면 그냥 저소득층 문제로만 비춰질 수 있다. 인종 데이터를 수집해야 정책적으로 고려대상이 되는 실재 집단이 될 수 있는데 그것부터가 안 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 데이터로 인종차별 경험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스페인의 인종 문제는 흑인/아시아계/라틴계/모로코계/Roma 등으로 아주 섬세하게 나눠질 수 있다.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정교한 통계를 갖추고 있으면서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다고 할 정도로 뒤쳐져 있음이 확실하다.